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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feAZ Essay
    • 2026.02.06
    • 조회수 17
  • 2026.02.06 조회수 17

AZ Essay

 

일상으로의 초대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빨리 돈 많이 벌어서 이 바닥 뜨고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의료인들의 꿈 중 하나는 하루라도 빨리 의업(醫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환자란 언제나 자기들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기껏 생각해서 말하는 의사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존재다. 그들은 언제나 이상 증상들을 늘어놓으며 괴로움을 호소한다. 그래 거기까진 참을 수 있겠어. 그런데 증상 발생과 그다지 관련 없어 보이는 일상의 문제까지 하소연할 건 또 뭐람. ‘그래, 아프면서 행복하기란 쉽지 않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매일매일 부정적 에너지를 휘감고 와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늘어놓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때론 고역(苦役)이다.

 

‘나는 정말 이런 인생을 바랐던가?’

 

이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한 번씩 피어오른다. 직업을 잘못 택한 것 같다는 후회가 느껴질 때마저 있다. 출근을 해서는 퇴근을 기다리고, 일을 하면서 언제나 휴가철을 기다린다. 이게 정말 잘 사는 것일까…….

 

비단 이 직업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돈 때문에 마지못해 일을 해야 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고문이나 형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성경에서는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에 동참한 대가로 남성은 평생 땀 흘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물론 아재는 예수 따위를 믿고 그러진 않지만 곱씹을수록 소름 돋는 이야기이다. 의료인이기도 하지만 자영업자이기도 한 나는 언제나 매출을 신경 쓰며,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하루는 약탕기가 고장 나고, 하루는 직원이 아프고, 하루는 결핵 검사를 받기 위해 보건소에 헐레벌떡 다녀와야 하고, 얼마 전엔 멀쩡하던 적외선조사기가 지지직거리더니 작동을 멈춰버리기도 했다. 어려운 질환을 고치거나 매출이 높은 날은 기세등등하다가 환자가 적게 오거나 힘든 일을 겪으면 한동안 우울해진다. 일희일비(一喜一悲)는 피할 수 없는 숙명, 더 이상 이것을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누구도 이런 삶을 꿈꾸지는 않았을 거다. 한 마디로 괴롭다. 쉬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이 고통은 정말 돈 때문에 생긴 것일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충분히 돈을 모아 금전 문제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오면 수많은 번뇌에서 벗어나게 될 줄 알았다.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의 평가 척도가 돈이지 않나.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의사인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등 과거에는 돈으로 다 평가할 수 없다고 믿었던 모든 행위와 가치들이 돈으로 환산되어 평가받는 세상이다. 돈을 충분히 벌면서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더 나아가 나의 행복까지 돈으로 사고 싶다고 느낄 만큼 우리의 몸과 마음은 충분히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다. 속물 같아 보일까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늘 알게 모르게 매출을 올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경험이 쌓인 덕에 실제로 매년 매출이 성장하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오해하는 분들이 계실까봐 덧붙이자면, 나란 놈은 이렇게 괴로운 척 말하면서 은근슬쩍 염장이나 지르는 그런 생퀴가 아니다. 여태 AZ 에세이를 읽어본 이라면 나란 인간이 얼마나 자학적이고 자조적인 성격의 인간인지 조금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첫 개원 때와 비교하면 나는 직원을 다섯 배나 고용하고 있고, 매출은 3배 이상 올랐다. 그런데 내가 매출로 인해 가장 행복했던 때는 이것저것 떼고 나니 몇 푼 남지도 않았던 개원 첫 달이었다. 대학 졸업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돈을 벌었다는 감격 때문이었겠지만, 얼마 벌지도 못했던 그 때 나는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돈으로 인한 걱정은 영영 안 하게 되리라는 착각을 할 정도로 의기양양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훨씬 잘 버는 지금의 나는 인생이 굉장히 괴롭고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도 불행한 감정을 글로라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뭐, 이조차 염장이라고? 원래 누구에게나 우주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애초에 행복과는 거리가 멀게 생겨먹은 듯하다. 불쾌한 일을 겪으면 마음은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한다. 어찌 보면 당연할 테지만 즐거운 것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마음이 거기서 만족하고 그치는 일은 없다. 즐거움은 잠시일 뿐 마음은 그 즐거움을 유지하려고 집착하거나 더 큰 기쁨을 찾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 즐거움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며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도저히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일부 연예인들이 왜 마약,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이 빌어먹을 마음 녀석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

 

이는 단지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철학적, 종교적 명제에 그치지 않는다. 동물이 부정적 감정을 더 쉽게 느낀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어떻게 알아냈을까?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림과 유사하게 뇌의 각 부위에 항상 전기 자극이 가해지도록 고안된 장치를 설계한다. 각 영역에 대한 자극은 동물이 불쾌함, 두려움, 공포, 통증, 심지어 아픔까지도 느끼게 만들 수 있다. 여러 번의 실험으로 징계 중추(Punishment Center)가 중뇌의 실비우스 관(aqueduct of Sylvius) 주위의 중심 회백질 영역, 위로 확장된 시상하부, 시상의 뇌실 주위 영역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주요 보상 중추가 내측 전뇌 다발(medial forebrain bundle)의 경로를 따라서, 특히 시상하부의 가측핵 및 배내측핵 속에 위치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Fucking science, 하여튼 생물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사에 낭만이라는 것은 사라져버렸다. 즐거움도, 고통도 다 뇌의 장난질이라는 과학의 발견에 아재인 나는 가끔 짜증을 느낀다.

 

 

그만 괴롭혀라, 사악한 닝겐!

 

 

혹시 궁금해 할까 싶어서 넣어봤어~

 

그렇다면 징계 중추와 보상 중추를 동시에 자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흥미롭게도 징계 중추에서의 자극이 보상과 기쁨 중추를 완전하게 억제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처벌과 공포가 기쁨, 보상에 우위한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이런 현상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무래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든가 성적 쾌락을 즐기는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맹수로부터의 위협이나 적들의 공격에 집중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여주었을 것이고, 뇌는 그에 따라 긍정적 자극보다는 부정적 자극에 더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진화해 왔을 게다. 요컨대 누구나 부정적인 이슈나 불행에 더 빠지기 쉽다. 그렇다. 당신이 유독 부정적이고 소심하고 못난 사람이라서 부정적인 게 아니라 원래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그러니까 부정적이라고 당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이런 과학적 사실을 들먹이며 쏘아붙여도 좋다.

 

물론 누구나 가진 부정성도 사람마다의 편차는 있다. 2016년 화제가 되었던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타이탄의 도구들》이라는 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유발 하라리의 책 내용을 더 많이 들먹거리는 경향이 있다는 구절을 읽고 난 뒤, 나는 의식적으로 유발 하라리를 언급한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니엘 카너먼 (Daniel Kahneman) 교수는 개인 수준에서 행복에 영향을 끼치는 변화가 적응과정으로 인하여 영속적인 효과를 얻지 못하는 이러한 현상을 ‘individual treadmill effects’ 혹은 ‘hedonic treadmill effects’이라고 명명했다.1)

 

인간의 행복 조절 시스템은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1에서 10까지의 척도로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 갖고 태어난다. 그런 사람들은 기분이 6에서 10사이에서 움직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8에서 안정된다. 그런 사람은 매우 행복하다. 설령 그가 대도시 변두리에 살며 주식시장 붕괴로 돈을 모두 날리고, 당뇨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더라도 말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울한 생화학 시스템을 가지고 태어난다. 기분은 3에서 7사이로 움직이고, 5에서 안정된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우울하다. 설사 그가 잘 짜여진 공동체의 지원을 받고, 수백만 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되며, 국가 대표 운동선수 같은 건강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의 우울한 친구는 심지어 아침에 5천만 달러 복권에 당첨되고, 정오에는 에이즈와 암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오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를 이룩하고, 저녁에는 여러 해 전에 실종되었던 딸을 찾는다고 해도 행복지수 7이상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뇌는 애초에 유쾌한 기분과는 거리가 멀게 생겨먹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똑같다.

 

 

사진만 봐도 느낌이 올 거다. 우리들 대부분은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특정 감정 선(線) 내에서 끊임없이 마음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살아간다. 물론 이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이 진화를 통해 만들어놓은 인체의 각종 시스템은 어떠한 극단적인 상황이 와도 계속해서 그것에 낙담하거나 쾌감을 느끼게끔 설계되어 있지가 않다. 정말이지 어떠한 상황에도 결국은 적응하게끔, 각종 생화학 시스템은 결국 설정된 평균값 근처로 회귀하도록, 욕이 나올 만큼 잘 짜여 있다. 그리고 한 개체인 인간들 간의 차이란 그렇게 극심해 보이지 않는다. 믿기 힘들겠지만 걔나 나나 별로 차이 날 게 없다. 누군가 겉보기에 극도로 행복해보이거나 불행해보일지 몰라도 결국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란 말이다. 물론 그 미묘한 차이가 크게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종이 한 장 차이를 평생토록 극복하지 못하는 일도 있지만.

 

내가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고 묘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든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의 길 따윈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겪는 이 불행을 환경 탓으로 돌리고 거기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보았자 큰 실효를 얻을 수 없으리란 걸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우울한 결말이지만 마음이 편했다. 벗어날 곳도 없고, 벗어난다 해도 특별히 더 행복해지지 않지만 늘 그렇듯 파랑새는 가까운 곳에 있다. 지금의 내가 굳이 행복을 찾아야 하는 공간이 있다면 주로 쳐 박혀 있는 바로 이 진료실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토록 불행하게 보이던 내 삶의 현장이 또 한편으로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니……. 이 뻔한 결론을 바보처럼, 꼭, 굳이, 글로 읽어야만 깨닫는다.

 

진료의 진정한 만족은 하루가 시작하고 하루가 끝나는 평범한 일상의 일 속에 있다. 나의 일생을 채워준 것은 평일과 일요일의 40년 기간에 걸쳐 매일 보아온 150만 명의 환자들이다. 나는 결코 돈을 위해 개업을 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의학면담』 中

 

어떻게 하면 이 공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에서 즐겁지 않고서는 인생이 즐거워질 수 없는 노릇이다. 업(業)이 괜히 업( Karma)이겠나? 카르마는 행위를 뜻하는 말인데, 이 단어에는 모든 행위가 시간적, 공간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현재의 행위는 그 이전의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미래의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나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무수한 선택과 연기(緣起)의 결과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이 긴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무언가 끊어나가야만 한다. (누군가에겐 내가 불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처럼 비춰질지 모르겠으나 기독교를 싫어하는 아재가 불교라고 딱히 좋아할 리는 없다. 나는 한의학이라는 생물학 분야 전공자이며, 현대생물학의 발달은 과학적 실험을 통해 과거 종교와 철학이 차지하던 자리를 밀어내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또 다른 책에서 지적했듯이 불멸과 영원한 행복에 도전하며 신의 자리를 탐하는 현대의 인간은 그야말로 호모 데우스(Homo Deus) 종족들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집착’을 버리라고 말하지만 생물학을 익힌 입장에서 볼 때 집착하지 말라는 건 말이 안 된다.

 

현대생물학에서 생명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으로 ① 조직화(구성), ② 에너지 사용과 대사, ③ 항상성 유지, ④ 생식 및 성장 반응, ⑤ 자극 감수와 적응의 다섯 가지를 꼽는다고 지난 호에 언급한 바 있다. 물론 무생물들 역시 위의 조건 중 일부를 갖추기도 한다. 대기업은 고도로 조직화 되어 있고, 컴퓨터는 자극에 반응하고, 많은 기계들은 에너지를 사용해서 대사한다. 하지만 위의 다섯 가지 요건을 다 갖춘 무생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다섯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을 때라야 그것을 생명이라고 바라본단다.

뭐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외부환경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된 정보를 판단하고, 판단한 정보에 적절하게 반응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 또, 외부환경에서 주어지는 각각의 정보에 대한 반응을 종합하고, 반응하기 어려운 정보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적응함으로써 생존의 범위를 넓혀나간다.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정신현상’은 신경생리학적으로 생명체의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는 예측시스템이라 규정할 수 있다. 왜 벌어지지도 않은 일 때문에 걱정하겠는가? 왜 이미 지나간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그에 대해 자꾸 회상하겠는가? 왜 지금을 살면서도 계속해서 과거와 미래를 마음에 담아두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너무나 고등한 동물인 까닭에 과도하게 예민한 예측 레이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집착과 번뇌, 고민들이 단지 어리석은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요컨대, 인간은 너무 뛰어난 까닭에 집착하게 생겨먹었다. 집착한다는 사실에 집착하며 괴로워하지 말고, 집착하는 것조차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며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살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머리로 아는 것처럼 대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우린 참 열심히 살아간다. 특히 한의사 동료들처럼 열심히 사는 족속들이 없다. 하루 종일 무리해가며 자신을 불태운다. 그런데도 임상의로서 내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은, 슬프게도 받을 수 없다. 분명 지식과 요령은 계속해서 쌓이는데 스스로를 훌륭한 치료자라고 말하기는 여전히 부끄럽다. 너무나 많은 분들을 만족시키지 못 했으니까.

그러다 경전의 한 구절을 읽고서 마음의 깊은 울림을 받았다. 임상의로서 내 자신을 바꾸는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글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 구절이다. 한의학의 경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이정변기론(移精變氣論)〉* 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함께 읽어보도록 하자.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감동이 있으려나?

 

* 〇 帝曰 余聞其要於夫子矣하고 夫子言不離色脉이라 此余之所知也이니다. 〇 歧伯曰 治之極於一이니다. 〇 帝曰 何謂一이닛가? 〇 歧伯曰 一者는 因得之이니다. 〇 帝曰 奈何이닛가? 〇 歧伯이 曰 閉戶塞牖하고 繫之病者하야 數問其情, 以從其意리니 得神者昌이오, 失神者亡이리다. 〇 帝曰 善이라!

 

황제(黃帝)가 말했다. “내가 선생으로부터 요점을 들었고, 선생께서는 색맥(色脈)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내가 알고 있는 바입니다.”

 

기백(歧伯)이 말했다. “치료는 한가지로 수렴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한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기백이 말했다. “한가지란 인(因)하여 얻는 것입니다.”

 

황제가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기백이 말했다. “문을 닫고 창문을 막고서 병자에 매달려서 여러 번 그 정황을 물음으로써 환자의 의중을 쫓아야 하니, 환자의 신(神)을 얻게 되는 자는 번창할 것이고, (환자의) 神을 얻지 못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훌륭합니다.”

 

번역은 언제나 어려운 작업이다. ‘신(神)’과 같은 글자의 뉘앙스를 정확히 살려서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신(神)’의 수십여 가지 의미 중에는 ‘마음. 사람의 본바탕(神出於忠〈呂覽〉)’이라는 뜻이 있다. 내 생각에 이 대화에서 ‘신(神)’을 얻으라고 말한 것은 전인적 관점에서의 환자의 본바탕을 얻으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한의학 경전에서 의성(醫聖)으로 설정된 인물 기백(歧伯)은 치료의 핵심이 한가지로 수렴된다(治之極於一)고 말하고 있다. 그 답은 바로 환자에 집중하고 근거함으로써 환자의 전인적 상태를 알아내는 것이다. 한 가지 핵심이 경락(經絡)에 대한 이해도 아니고, 약리(藥理)를 깨우치는 것도 아니고, 환자에 기인하여 얻어내는 것이라니…….

 

문을 닫고 창문을 막으라는 것은 그만큼 정신을 분산시키지 말고 환자에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그게 실제 환자를 치료하는데 얼마나 중요하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치 종교인들이 계명을 지키듯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말을 지키려 노력한다. 진찰할 때는 언제나 문을 닫고 정신을 집중한 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서 환자와 소통하기 위해 애쓴다. 진찰 과정이 굉장히 경건하면서도 즐거운 의식처럼 느껴진 것도 바로 그때쯤이다.

 

 

환자의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호소하는 내용만 들리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환자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녀가 지금 불안한 것인지, 걱정하는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단지 이야기를 하는 것뿐인지……. 나는 그 감정을 인정해주고 적절히 안심시키고 공감해주기 위해 힘쓴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는 부위를 유심히 지켜보면 피부의 색택이 다른 부분과는 달리 특이하게 검고 붉은 점이 분포한 것, 주리의 모양과 크기 등이 눈에 들어온다. 통증 부위를 손으로 섬세히 만지다 보면 실제 어떤 부위의 피부가 조금 더 경결되어 있는지, 아픈 부위가 정확히 어딘지 확인할 수 있다. 또 환자의 목소리를 자세히 듣다 보면 톤과 울림의 정도를 통해 내부의 수분 함유 정도를 예측할 수 있게 되고, 숨이 가쁘진 않은지, 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대화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과정에서 얻는 정보만도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것들을 잡아내기 위해선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데,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다른 잡념들이 끼어들 틈이 없다.

 

I hope everybody could get rich and famous and will have everything they ever dreamed of, so they will know that it's not the answer.

- Jim Carrey

 

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에 ‘사무사(思無邪)’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생각함에 삿됨이 없다는 뜻이다. ‘시 300편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라는 구절은 굉장히 알쏭달쏭한 표현인지라 해석도 다양하다.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 전집으로, 《시경》에 수록된 네 부류의 시가들은 각 제후국에서 유행했던 민간 가요의 가사, 왕의 직할지에서 유행했던 시가, 왕실의 연회나 의식에 쓰이던 시가, 종묘 제례 때 불리던 노래의 가사 등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유행가 가사 같은 것인데, 사실 시경의 내용이 대단한 건 아니다. 오히려 야하고 상스러운 가사들도 많다. “와 저기 지나가는 아가씨 겁나 쌔끈하네.” 뭐 이런 내용의 글이 많다. 그 삿됨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문장을 익히는 데 집중하라는 것이 사무사(思無邪)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수업해주신 한 교수님의 설명이 나에게는 다른 유명한 주석보다 가장 크게 와 닿았다.

 

진료실 공간에 ‘사무사(思無邪)’라는 문장을 원훈(院訓)처럼 걸어놓은 형님이 계신데 그 분과 사무사(思無邪) 이야기를 나누다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삘 받아서 폭음했던 지난밤이 생각난다. 쉽지 않지만 나도 그 형님을 따라 책상에 ‘사무사(思無邪)’라는 글귀를 붙여놓고 진료에 임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 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만일 즐거운 일이나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다. 당신이 슬픔을 경험하되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실제로 슬픔 속에 풍요로움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되 그것이 계속 유지되며 더 커지기를 집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계속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마음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마음의 불이 꺼지면 집착은 완벽한 만족과 평온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문자 그대로 ‘불끄기’란 뜻인데, 열반에 이른 사람은 실재를 극도로 분명하게 경험하며 환상이나 망상에서 자유롭다. 이들도 분명 불쾌함이나 고통에 맞닥뜨릴 테지만, 그런 경험은 이제 아무런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정말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이 훈련기법은 이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각광 받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사용한 뇌 휴식법으로 유명한 마인드풀니스에서도 역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마인드풀니스는 팔리어의 ‘싸띠’(Sati)를 영역한 것이다. ‘싸띠’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만을 일어나는 방식 그대로, 왜곡하지 않고 정확하게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2)을 의미한다. 한자어로는 지금(今)의 마음(心)이라는 의미에서 ‘념(念)’으로 번역된다.

 

예일대에서 뇌과학을 연구한 미국의 정신치료 전문가 구가야 아키라 씨에 따르면 뇌의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는 지난 일에 연연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불안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쉬면 피로가 덜 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개원의라면 모두 뼛속 깊이 느끼고 있을 게다. 환자가 많이 와서 미친 듯이 바빴던 날에는 차라리 몸이 개운하지만, 환자가 오지 않아 하루 종일 모니터만 쳐다본 날은 마음과 몸이 무겁고 지친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뇌는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고 공회전하며 에너지를 소비한다고 한다. 집중력 저하와 피로는 잡념에서 비롯된다. 쓸데없는 잡념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을 주는 마인드풀니스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 무의식적으로 하던 내 행동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과 다른 게 아니다. 그래서 현재 뇌과학은 불가의 가르침에 집중한다.

 

호흡에 집중하고 ‘지금’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그 순간 매일 똑같은 일상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기적이 찾아올 것이다.

 

 

글_고든 심지

 


참고문헌

1) Kahneman D, Edward D, Schwarz N. Well-being: Foundations of hedonic psychology. NY: Russell Sage Foundation; 1999.

2) 최훈동. 마인드풀니스의 개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2007 추계학술대회; 2007 Oct 25-6; 서울. 서울: 대한신경정신의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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