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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fe의철학 연구 노트
    • 2026.02.06
    • 조회수 18
  • 2026.02.06 조회수 18

의철학 연구 노트

 

나의 살던 서울은 ①

 

 

 

 

전근대적 생활과 사고방식을 뜯어 고치고 근대화를 위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될 때 나는 서울로 왔다. 1972년, 국민학교 4학년 2학기부터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당동으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놀란 것은 땅바닥도 빛난다는 사실이었다.

 

비가 온 날이었다. 우리 옆집은 요즘으로 치면 동네 마트와 같은 가게였는데, 그 가게에 켜놓은 백열등이 시멘트 바닥에 고인 빗물에 비쳐 빛나고 있었다. 서울은 땅도 반짝이는구나…….

 

시골에서 올라와 사투리를 쓰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전학생을 서울 아이들은 이상하게 쳐다봤을 것이다. 그런 것 같았다. 서울 아이들은 얼굴도 손도 하얬다. 내 손은 딱지가 질 정도로 때가 껴서 손을 내밀기 부끄러웠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깨끗해진 것 같다. 얼굴도 하얗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내 몸에서는 냄새가 많이 났을 것 같다. 나에게 목욕이란 여름에는 냇가에서 멱을 감는 것과 겨울에는 한두 번, 부엌에서 큰 다라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하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서울에 와서 놀란 것 중의 또 하나는 시험문제였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험을 보는데, 나팔꽃이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는지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지를 묻는 문제가 나왔다. 나팔꽃을 갖고 놀던 나로서는 이런 문제가 시험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큐 테스트라는 것을 하는데, 지문이 대부분 미국의 것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대부분 현실의 일상생활과는 관계없는 것들이었다. 노래도 춤도 모두 서양의 것이었다. 그런 노래나 춤은 학교를 나오면 아무도 따라하지 않았다. 운동이나 체조 역시 그러했다. 그런 운동이나 체조는 학교 아닌 곳에선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생활이 계속되면서 점점 그런 것이 익숙해지고 하나씩 나의 일상이 되어갔다. 나도 더이상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외국영화는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 이러저러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외국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사랑하던 사람끼리 이별을 하게 되면 울거나 소매를 부여잡거나 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무표정하게(소위 ‘쿨’하게) 그냥 돌아서는 것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들어 더 이상 그 영화를 보기가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사람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내 유전적 결함이 더하여 영화를 다 본 뒤에도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착하고 나쁜 사람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007 시리즈 같이 선과 악이 분명한 영화조차 그랬다. 그러니 외국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국민학교를 다니며 배구부에 들어간 것은 그나마 시골촌놈의 기를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딱히 연습한 적이 없었지만 서전트 점프를 곧잘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키가 큰 편이어서 배구 코치 선생님이 내게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선생님과의 만남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 일은 우리 배구부가 전국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인하대로 가는 버스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들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중간에 어느 할머니께서 올라오셨다. 나는 얼른 일어나 “여기 앉으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코치 선생님께서 나를 째려보시더니 “너나 앉아 있어.”라고 하셨다. 아마도 체력을 비축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를 이해한 것은 훗날 경제학과 역사를 공부한 다음이었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었고 나는 문득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상처를 입곤 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지 못한 채 그냥 시류에 묻혀 떠밀려가고 있었다. 시골촌놈의 새카만 얼굴이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하면서 내 생활양식과 사고방식도 점점 근대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잔소리 들을 나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사춘기가 시작되고 국민학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나는 ‘잔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나는 부모님께 거의 혼나본 적이 없었다. 막내라서 발언권도 별로 없었지만 나는 집안이나 밖에서 늘 착한 아이였다. 그러나 대인관계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아버님께서는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 집을 나설 때는 어디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다녀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마주대하라.)이라든가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과 같은 말씀을 자주 하셨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읽어라, “효(孝)는 만사의 근본이다.”는 등의 말씀도 자주 들었다. 막연하지만 무언가 나만의 것을 찾아 만들고 싶은 나의 욕구와,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가족의 일원임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아버님과의 사이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찰 중에 하나가 내 진로 문제였다. 한번은 아버님께 “저는 앞으로 미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아버님께서는 한 마디로 “환쟁이 될 일 있냐?”고 하셨다. 이런 일은 고등학교 때에도 다시 반복되었다. 아버님께 “저는 앞으로 음대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아버님께서는 한 마디로 “풍각쟁이 될 일 있냐?”고 하셨다. 거기에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지만, 어떤 소녀를 짝사랑하다 그나마 만나지 못하게 되자 세상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괜히 ‘센치(sentimental)’해져서 밤새 일기를 쓰다 자곤 했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때 소설과 시가 위안이 되었다.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대학생들이 읽는다는 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농구를 하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 시험기간에도 음악 백과사전을 읽었고 미국 팝송과 잡담으로 도배된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기도 했다. 집안에 굴러다니는 화첩은 표지가 거의 닳도록 보았다. 그래도 이제 막 피어나는 청춘의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밑도 끝도 없는 갈증에 목말라하면 할수록 부모님과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도 내 근저에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효와 예(禮)에 관해서는 아주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아버님의 《명심보감》 표 ‘잔소리’는 반항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나의 사고방식을 크게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대학에 들어가다

 

70년대까지는 라디오는 물론 텔레비전에도 국악 프로그램이 적지 않았다. 한밤에는 〈국악의 향기〉와 같은 전문적인 프로도 있었다. 안향련은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이은주, 묵계월, 안비취 등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김세레나는 민요를 편곡하여 부른 노래로 인기를 누렸다. 웬만한 코미디 언이나 프로그램 진행자들은 노랫가락 몇 소절 정도는 다 할 줄 알았다. 최초의 대중가수들은 대부분 창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 뒤에도 이런 흐름은 계속 이어졌다. 대표적인 가수가 김추자(1969년 데뷔)다. ‘잠자던 돌부처도 불러 세웠다.’는 김추자는 춘천여고 재학시절 춘천향토제에 나가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고, 이은관(배뱅이굿)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을 정도로 창도 맛깔나게 불렀다.1) 조용필(1968년 데뷔)은 처음부터 판소리를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정지되었을 때, 〈한오백년〉을 부르기 위해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조용필은 실제 공연에서 신디사이저 반주를 깔고 흥부전의 한 대목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 그런 프로와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어려서 즐겨 불렀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섬마을 선생님〉은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산업사회로 급격히 변해가는 시류에 맞춰 과거의 전근대적인 양반/상놈의 구분이 더욱 옅어져, 누구라도 열심히 일해서 돈만 벌면 출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그런 출세의 출발점은 근대적 교육이었다. 정부에서도 근대화를 추진할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교육에 힘을 실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청년들이 교사로 배출되어 전국 곳곳에 파견되었고 급기야 섬마을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열아홉 살 섬 색시와 철새처럼 찾아온 총각 선생님의 사랑과 이별은 근대와 전근대의 만남과 이별 그 자체였다. 섬마을 아가씨는 서울(근대화)일랑 가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총각선생님(근대인)은 사랑도 버리고 서울로 떠나버렸다.

 

이미자에 이어 나훈아와 남진은 본격적인 근대화의 과정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정서를 노래했다. 근대화에 떠밀려 고향에서 내몰린 수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어머니를 그리워 했다.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나 남진의 〈어머님〉이 그러한 노래다. 설날이면 사람들은 나훈아와 남진의 노래를 부르며 지옥 같은 기차를 타고 꾸역꾸역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향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고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고향에 가는 것도 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들리기 위해서였다.

 

근대화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출세시키기 위해 소 팔아 대학에 보낸 자식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된장, 고추장에서부터 나중에는 땅까지 팔아 도시의 자식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도 불렀다. 이 부모들은 도시는 끊임없이 농촌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그런 과정을 통해 도시는 농촌을 파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고령화되고 점점 소멸되어 가는 농촌이 당신들의 희생과 자식에대한 헌신으로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한편 도시로 온 사람들이 모두 고향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도시에 살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고향을포기하거나(남인수, 〈고향의 그림자〉) 아니면 도시를 찬양하거나(패티김, 〈서울의 찬가〉) 그도 아니면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최희준, 〈하숙생〉).

 

이런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정치 역시 급변하고 있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발포되었고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행사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육여사의 사망을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그 사건은 한국 사회가 급격한 근대화와 정치의 후진성으로 인해 돌이키기 어려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신호였다. 당연히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이 들끓었다. 74년부터 선포되기 시작한 ‘긴급조치’에도 불구하고 재야 원로와 교회, 학생 등을 중심으로 유신철폐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런 변화를 잘 모르기도 했고, 그런 일보다는 미국 팝송과 그것을 번안한 노래, 청바지와 장발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에 빠져 들어갔다. 특히 김민기(1970)를 비롯한 양희은, 송창식 등 통기타 세대의 노래와 오랫 동안 미8군 무대에서 노래했던 신중현과 그의 노래(김추자)가 가슴에 와 닿았다. 미국에서 히피문화를 접하고 들어온 한대수의 〈물 좀 주소〉(1974)라는 노래는 제목 그대로, 그 거친 목소리 그대로,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이 내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못마땅해 하시는 부모님을 졸라 나도 기타를 샀다. 세상을 얻은 듯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나 어떻게〉(샌드패블즈, 1977)를 외쳤다. 정말 무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 대학에 들어갔다.

 

 

 

 

학교 공부를 포기하다

 

내가 경제학과를 택한 것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웬만한 대학에 들어가면 졸업하게 되어 있었고, 졸업하면 전공보다는 대강 그 대학의 수준에 맞는 직장이 보장되어 있었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은 취직에 더 유리하다고 들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나를 더 세속적으로 만들어 나 자신을 학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학교와 공부와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경제학원론 첫 시간에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들어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칠판에 이렇게 썼다.

 

‘Ceteris Paribus!(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경제학의 출발점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사기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니! 현실에는 다양한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은 늘 변하고 있는데도 그걸 같다고 전제한다면 이건 사기다. 최소한 거짓말이다. 그 다음 경영학개론 시간에 들어오신 교수님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30만 원짜리야. (좋다고 하는) 모 대학을 졸업해도 월급이 25만 원이거든. 너희들은 30만 원짜리 최고 직장에 들어가게 될 거야.”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사학(史學)을 부전공으로 택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학교에는 관점과 방법론이라는 문제를 떠나서 최소한의 학문적 성실성과 치열함으로 존경받던 교수님이 여러 분 계셨다. 특히 사학과에 그런 분이 많았는데, 어떤 교수님은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면서 점심시간까지 아꼈다. 시간도 아껴야 하지만 교수 사이의 정치가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학과 몇몇 교양과목을 제외하고 경제학은 최소한의 학점만 얻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학교에 다니는 재미가 없어졌다. 유일한 재미는 학교 끝나고 종로에서부터 청계천에 이르는 책방을 순례하는 일이었다. 종로에는 종로서적이 있었고 동대문 쪽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책방이 몇 군데 나온다. 동대문을 거쳐 청계천부터가 내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때는 서너 구역에 걸쳐 헌책방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고 각 책방에는 헌책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자주 들리다보면 주인과도 안면이 트여 싸게 해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뒤쪽에 감춰놓았던 책을 권해주기도 했다. 그런 도서는 대개 금서였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이 실린 《사상계》(1970)와 〈비어(蜚語)〉가 실린 《창조》(1972)도 그렇게 구했다. 족히 네댓 시간 걸리는 책방 순례를 마치고 나면 주저앉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내 손에는 몇 권의 소중한 책이 들려있었다. 그 재미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다녔다. 그렇게 1년을 지내니 산 책이 거의 100권이 되었다. 이런 책 수집광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한의대를 들어오고 나서는 홍콩의 삼련서점(三聯書店)에 매월 우편주문을 했고 국교가 수교된 이후에는 책을 사기 위해 중국에도 자주 들렀다. 일본과 미국에도 갔었는데 중국에서 구할 수 없었던 책을 미국의 한 책방에서 구한 적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대개 필요한 만큼 책을 찍기 때문에 책이 출판되면 바로 구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구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7,80년대의 한국에서는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진보적이면 바로 금서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책이 나왔을 때 바로 사야했다. 심지어 막스 베버(Max Weber)의 책도 ‘막스’라는 이름이 들어갔다고 금서가 되는 시절이었다. 당장 읽지 않는 책이라도 나중에 필요하다고 여기거나 하나쯤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구하려 애썼다. 어떤 사람은 나보고 저 책들을 다 보았냐고 묻기도 한다.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매일 다 본다고, 당신도 지금 보고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책을 모으다보니 나중에는 이 책들은 나만 볼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어떤 분야를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이면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책을 샀다. 사전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전집 역시 늘어났다. 사들이는 분야도 인문, 사회,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음식 등으로 점차 넓어졌다. 이런 책들은 의외로 한의사가 되고 난 뒤 큰 도움이 되었다.

 

남들은 술 마시고 노는데 쓰는 돈을 책에 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나 스스로 비싼 음식점이나 술집에는 가지 않게 되었고, 혹시라도 그런 자리에 가면 아주 불편했고 비싼 옷이나 물건을 선물 받아도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대략 3-4만 권의 책이 쌓여 있고 지금도 쌓이고 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가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한 서클에 들어가게 된다. 정식 명칭은 민속문화연구회였지만 주로 탈춤을 추었기 때문에 그냥 ‘탈반’이라고 불렀다.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훌륭한 선배들과 친구들을 만났다. 질펀하게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무엇보다 숨 쉬기보다 더 익숙했던, 아니 그런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묻혀 있던, 그렇지만 까마득히 잊혔던 우리 ‘전통’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1978년 즈음 우리의 전통문화는 ‘전근대적’이라는 모욕을 받으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것은 문화재로 등록되어 박제화 되었다. 문화는 사람 사이의 무늬다.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무늬를 만들고 그 무늬는 다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같이 어우러져 살만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사이의 관계는 늘 변하기 때문에 무늬 역시 고정되지 않는다. 무늬가 고정되면 그것은 더 이상 문화가 아니다. 일제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파괴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함께 미국문화가 주입되기 시작했고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이어받은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 운동을 통해 조직적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했다. 그 결과 두레가 사라지고 대신 새마을회관이 들어섰다. 굿과 탈춤이 사라지고 ‘뽕짝과 팝송, 그리고 댄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60년대 말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문화운동과 그 주요 축이었던 탈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나는 탈춤을 통해 공부를 시작했다.

 

[개구리 소리] 이오덕 시, 김영동 작곡

 

거뭇거뭇 숲속에 퍼런 못자리 물속에

도랑물 옆 핀 꽃 따라 포플러 신작로 따라

울어라 개구리야

 

학교에서 뛰놀다가 늦게 왔다고 꾸중듣고

저녁 먹다 엎드려 잠든 내 동생 꿈속에서

울어라 개구리야

 

바라보는 밤하늘별 눈물에 어려 빛나고

돈 벌러 간 아버지 소식이 궁금해

울어라 개구리야

 

읍내 장에 나물팔고 돌아오는 어머니

빈 광주리 가득히 네 노래 담고 오신다

울어라 개구리야

 

외딴집 빨간 불빛 들판에서 도랑물 옆

핀 꽃 따라 포플러 신작로 따라

울어라 개구리야

 

 

 

글_박석준 (흙살림동일한의원 원장)

 

편집_김윤주

 

 

참고문헌

1) 최규성. [추억의 LP여행] 김추자(上) [인터넷]. 서울: 주간한국; 2001년 1월 1일 [인용 2018년 4월 21일]. 참조: http://weekly.hankooki.com/whan/200106/w200106061439106151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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