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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cholarship몸으로 들어가는 두 가지 길
    • 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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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6 조회수 6

몸으로 들어가는 두 가지 길

 

황제내경과 동의수세보원 ③

 

 

 

 

《황제내경(黃帝內經)》에 따르면, 몸은 기(氣)로 만들어지고, 기(氣)로 채워져 있으며, 기(氣)의 자발적인 운동에 의해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기(氣)의 운동이 비정상적이면 몸은 병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한의학 범주에 속하는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서는 인간의 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무런 언급도 없을 뿐 아니라, 몸의 핵심인 오장육부를 인식하는 방법이나 몸의 생명력인 기(氣)에 대한 사고도 《황제내경》과는 다르다고 전 글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생명력을 유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황제내경》이 기(氣)로써 설명하고 있다면, 《동의수세보원》은 사람이 어떻게 사물과 반응하고 행동하는 지가 몸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왜 같은 한의학인데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인체를 설명 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한 이제마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기존의 한의학적인 개념과는 다른 방식을 지닌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한 이제마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마(李濟馬)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의학자입니다. 이제마 이전의 유학자 중에도 의학을 배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음양오행과 기(氣)로 이론체계를 갖춘 전통 한의학을 배우고 임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마는 전통 한의학을 공부하고서도 그것을 답습하지 않고 유학의 세계관으로, 조선 유학이 사람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이해한 유학으로 몸을 해석하여 ‘유학적 의학’을 만들었습니다. 음양오행과 기(氣)로 인식하던 몸을 유학적 개념으로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몸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제마가 몸을 재구성하는데 사용한 핵심 개념은 사람의 본성과 감정, 그리고 ‘성정(性情)’입니다.

 

所謂修身이 在正其心者는 心有所忿懥則不得其正하고 有所恐懼則不得其正하고 有所好樂則不得其正하고 有所憂患則不得其正이니라.

 

이른바 몸을 수양함이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다하는 것은 마음에 화내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 《대학·7장(大學·7章)》

 

 

 

몸의 감정

 

이제마는 몸을 건강하게 만들거나 병들게 하는 주 원인으로 ‘감정의 절제와 부절제’를 들고 있습니다. 물론 감정이 병의 원인이라는 사고는 전통 한의학에도 있었지만, 이제마는 감정이 병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니라 전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복통, 설사와 같은 질환도 상한 음식이나 과식 또는 한사(寒邪)같은 외부의 침입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감정의 부절제 때문에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10살인 소음인 어린이가 평소 쓸데없는 걱정(사려과도, 思慮過度)으로 기(氣)가 소모된 상태에서 하루 이틀간 우수에 젖어 있으면 복통, 설사병이 반드시 생기더라는 이제마의 임상 예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는 사고는 전통 한의학의 큰 특징 중 하나입니다. 기(氣)가 넘치면 감정 표현이 넘쳐서 과도하게 웃거나 화를 내는 반응이 주로 나타나고, 기(氣)가 부족하면 감정표현이 줄어들어 우울해하거나 슬퍼하는 반응이 많이 나타납니다. 또한, 너무 화를 내면 간(肝)의 기(氣)가 손상되고 너무 슬퍼하면 폐(肺)의 기(氣)가 손상되며, 너무 웃으면 심장(心臟)의 기(氣)가 다칩니다. 이렇게 전통 한의학에서도 감정이 절제되지 않아 넘치거나 부족하면 병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때의 감정은 반드시 기(氣)와의 감응(感應)을 통해서 발현됩니다. 전통 한의학에서 감정은 기(氣)의 한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의보감》도 기(氣)의 일종인 〈신(神)〉에서 칠정(七情)과 오지(五志, 魂神意魄志)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마의 ‘감정에 의해 병이 생긴다’는 주장은 명제만 놓고 보았을 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황제내경》에서도 신체와 감정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내경》에서는 신체와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기(氣)로 이루어진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꿈의 해석》을 통해 정신의 병, 감정의 병을 말하기 전에는 근대의학에 정신과 영역이, 정신질환이 따로 분류되어 있지 않았고, 감정에 의해 병이 생긴다는 사고(思考)도 없었습니다. 마음이나 감정은 중세까지 신의 영역이었지 인간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체와 마음의 이분법은 유럽에서는 오래된 사유방식입니다.

 

* 마음, 정신, 감정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오지(五志)와 칠정(七情)은 다른 범주로 두고 구분하지만, 때로는 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섞여 있을 때도 있다. 굳이 나누자면 마음은 흰 도화지이고 정신은 방향성이나 목적성을 가진 마음이며 감정은 마음의 물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마음에는 물결이 일어나고, 곧 감정이 생기게 된다.

 

최근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몸의 철학》에서 마음이나 감정은 신체와 다른 것이지만 오랫동안 신체와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신체화되었다고 하면서 ‘신체화된 감정’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1) 이런 새로운 개념의 형성은 근현대 의학에서 마음이나 정신을 신체와 다른 영역으로 보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마음과 감정에 대한 현대 의학의 관심이 커지고 있고, 이는 마음과 감정이 심장이 아닌 뇌에서 발생한다는 관점에 따라 뇌과학, 뇌의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황제내경》이나 《동의수세보원》에서 드러나는 동아시아 의학의 이론체계에서는 근현대의학과 달리 감정 또한 몸의 일부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마음과 감정의 비정상이 신체에 작용하고, 신체의 비정상이 마음과 감정에 작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체와 감정이 한 몸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황제내경》과 《동의수세보원》의 감정과 마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황제내경》의 ‘감정’이 오장육부를 비롯한 몸 전체의 기(氣)와 감응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기(氣)의 일종이라면, 《동의수세보원》의 ‘감정’은 성(性)과 정(情)으로 나뉘며, 4가지 체질의 형성부터 건강과 질병 같은 몸 전체의 생명현상을 주재합니다.

 

 

 

사칠논쟁(四七論爭)

 

이제마의 주요 용어가 성리학이나 맹자 유학에서 왔기 때문에 성리학의 주요 개념을 이해하면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공부하기가 좀 더 쉽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의 유학과 성리학에 대해 조금 살펴 보겠습니다.

 

조선 유학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논쟁으로 시작하고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줄여서 ‘사칠논쟁’이라고 하는 이 논쟁은 조선 유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퇴계(退溪) 이황과 고봉(高峰) 기대승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논지를 펴고 상대방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이 논쟁이 59세의 대학자 이황과 32살의 이름없는 학자 기대승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데에서 이황의 학자적 자세가 권위적이지 않고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도 ‘고수(高手)입네’ 하는 학자들이 어린 후배들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거나 혹은 훔쳐다가 자기 것인 척하는 행태가 많은데, 이황은 전혀 그런 자세 없이, 학자 대 학자로, 발칙하게 까부는 기대승을 대우하고 존중해줍니다.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가리기에 앞서서 저는 이황의 그런 태도를 정말 높이 사고 싶습니다.

 

사단(四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인간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음을 드러내 주는 단서인 네 가지 마음이며, 맹자가 성선설의 근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칠정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인데 줄여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하며 사람이 가진 모든 감정을 가리킵니다. 주희(朱熹)에 의하면 인의예지는 성(性)이고 사단은 정(情)으로, 인의예지라는 성(性)이 사단이라는 정(情)으로 나타납니다. 정(情)은 성(性)에 근거하고 성(性)이 발하면 정(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희노애락도 정(情)이라는데 있습니다. 사단이라는 정(情)은 선한 성질의 감정인 데 반하여 희노애락이라는 정(情)은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희노애락은 절제되어 나타나면 선하고 절제되지 않은 상태로 나타나면 악합니다. 이 문제가 리기(理氣)와 결부되어 논란이 된 것이 ‘사칠논쟁’입니다.

 

* 전호근. 사칠리기논쟁. In: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서울: 예문서원; 2000. 149-80 p.의 내용을 일부 정리하여 실었다.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성리학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제마의 주요 용어가 성리학이나 맹자 유학에서 왔기 때문에 성리학의 주요 개념을 이해하면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공부하기가 좀 더 쉽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성(性)’은 선한 우주 자연의 이치(理)가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기에 선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性)의 발현인 인간의 감정(情)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은 ‘사단’과 ‘칠정’으로 표현됩니다. ‘사단’은 인간의 감정 가운데 적절한 것, 즉 선한 것을 가리키며, ‘칠정’은 모든 감정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리(理)’와 ‘기(氣)’는 우주 만물을 이룹니다. ‘리(理)’는 순수하며 선하고, ‘기(氣)’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우주 만물은 ‘리(理)’와 ‘기(氣)’가 합쳐져서 생겨난 것이라 ‘리(理)’로만 이루어진 것도, ‘기(氣)’로만 이루어진 것도 없습니다. 즉 현실에서 ‘리(理)’와 ‘기(氣)’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理氣不相離)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입니다. 만약 도덕성의 근거인 ‘리(理)’를 선도 악도 아닌 ‘기(氣)’와 섞어서 논의한다면 도덕성의 근거를 확보하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근원적, 논리적, 학문적 차원에서는 ‘리(理)’와 ‘기(氣)’를 뒤섞어서는 안 됩니다.(理氣 不相雜) 주희는 바라본 성(性)은 순수한 리(理)가 부여된 것이기에 원래는 선한데, 현실에서는 리(理)가 기(氣)와 섞여 있기에 선함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근원적으로 선한 리(理)를 간직한 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하고, 현실에서 기(氣)와 섞인 본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합니다. ‘본연지성’은 근원적, 논리적 차원에서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기질지성’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마가 말하는 ‘성(性)’은 기질지성에 가깝긴 합니다만, 정확히 기질지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기질지성이 리(理)로부터 부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을 기반으로 고봉과 퇴계의 사칠논쟁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퇴계는 도덕성의 근거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그 때문에 현실에서는 분리할 수 없는 ‘리(理)’와 ‘기(氣)’를 분리하여 선한감정(사단)은 리(理)의 발현이고,(四端 理之發*) 선도 악도 아닌 감정의 총체(칠정)는 기(氣)의 발현이라고 주장합니다.(七情 氣之發). 이에 비해서 고봉은 주희의 논리에 충실하여 ‘리(理)’와 ‘기(氣)’는 분리할 수 없으며, 사단도 칠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퇴계를 비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리(理)’는 원리로서 작용할 뿐 주체성, 운동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퇴계가 ‘리지발(理之發)’이라며 마치 리(理)가 주도적으로 사단을 발하며 운동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부분을 지적합니다.

 

* ※주의 : 리(理)에서 발현한 것(發於理)이 아니라 리(理)가 발현한 것이다.

** ‘기(氣)’에만 운동성이 있다.

 

여러 논쟁 끝에 퇴계는 사단이란 리(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四端, 理發而氣隨之), 칠정이란 기가 발하고서 리가 올라탄 것이라고 합니다.(七情, 氣發而理乘之) 즉 사단은 선한 감정이고, 칠정은 선해지기도 악해지기도 하는 감정입니다.

 

이것을 달리는 말에 사람이 탄 것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말(氣)이 움직이고 사람(理)은 그 위에 올라탑니다. 사람이 달리는 말을 잘 조정하면 원하는 방향(선함)으로 가지만, 잘 조정하지 못하면 원하지 않는 방향(악함)으로 가는 것처럼 칠정은 ‘리(理)’가 ‘기(氣)’를 어떻게 조정하는가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드러납니다. 이러한 퇴계의 수정안은 ‘리(理)’와 ‘기(氣)’를 분리할 수 없다는 비판은 수용한 것이지만, 사단도 칠정의 일부라는 비판은 수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퇴계는 감정의 출발에서부터 ‘선한 감정(사단)’과 ‘선악이 뒤섞인 감정(칠정)’을 분리하여, ‘선한 감정’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후에 이들의 논쟁에 대해서 율곡(栗谷) 이이는 사단과 칠정, 모두 기(氣)가 발하고서 리(理)가 그것을 올라탄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이것을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 합니다.*

 

* 사칠논쟁에 대한 필자의 이해 수준이 낮아서 동양철학 전공자인 구태환 선생님 지도하에 해당 부분을 작성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감정과 선악*

 

이렇게 사칠논쟁으로 시작된 감정의 선악 문제는 조선 시대 유학자라면 한 번쯤 의견을 내야 할 만큼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이제마 또한 이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서 ‘성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유학의 성정과는 용어만 같을 뿐 이제마의 성정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개념이 다르다면서도 사칠논쟁을 자세히 소개한 까닭은 이 논쟁을 통하여 성정과 선악을 이해하여야 이제마가 성정 개념을 왜 새롭게 해석하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동아시아에서 선(善)은 사람의 도리에 맞는 것이고, 악(惡)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惡은 ‘미워하다, 싫어하다, 나쁘다’라고 해석해야 하며 악마와 같은 악(evil)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惡’은 많은 경우에 ‘악’으로 읽히기보다는 ‘오’(미워하다)로 읽힌다. 악행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예의에 어긋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악은 극기(克己)를 통해 복례(復禮)하면 선해질 수 있고 선(善) 또한 상황에 따라 악(惡)이 되기도 한다.

 

 

먼저 이제마의 ‘성(性)’ 개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명론(性命論)〉에 “넓게 통하는 것이 성(性)이다”* 라고 하였는데, 넓게 통하여야 할 것은 주책(籌策), 경륜(經綸), 행검(行檢), 도량(度量)** 이고 이 네 가지는 각각 턱, 가슴, 배꼽, 아랫배에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를 넓게 통달하여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것이 성(性)입니다.

 

* 《동의수세보원》 1-14 : “大同者 天也 各立者 人也 博通者 性也 獨行者 命也”.

** 정확한 해석은 아니지만, ‘주책(籌策)’은 주판을 튕겨 이해득실을 꾀하는 것이고, ‘경륜(經綸)’은 헤아리고 다스리는 경험이며, ‘행검(行檢)’은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살펴보는 것이며, ‘도량(度量)’은 세상을 품은 크기, 즉 배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턱, 가슴, 배꼽, 아랫배에는 간사한 마음(邪心)이 많아서 넓게 통달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간사한 마음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마음인데 구체적으로는 ‘교긍벌과(驕矜伐夸)’라고 합니다. 타고난 재능은 큰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발휘되므로 교만함, 뿌듯함, 뽐내고 뻐기는 마음, 과대 포장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데 이것이 ‘교긍벌과’라는 간사한 마음입니다. 넓게 통하여 성(性)이 되기 위해서는 ‘교긍벌과’를 다스리면서 타고난 재능을 활짝 펴야 합니다.

 

이제마의 성(性)은 하늘(理)이 부여한 것도 아니고, 선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넓게 통달하면 선(善)이 되고 넓게 통달하지 못하여 교만함에 빠지면 악(惡)이 됩니다. 이제마의 성(性)은 스스로가 타고난 재능을 자각하여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얻어지고, 이로써 선(善)해집니다. 그렇게 얻어진 성(性)은 도덕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애성(哀性), 노성(怒性), 희성(喜性), 락성(樂性)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속이는 것을 보고 슬퍼하고(哀性), 서로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 화내며(怒性), 서로 도와주는 것을 보고 뿌듯해하고(喜性), 서로 보호해주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樂性) 감정이기에 도덕적 감정이라고 합니다. 개인의 감정이 아닌 공동체 속에서 생기므로 사회적 감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정(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속이면 슬퍼하고(哀情), 다른 사람이 나를 업신여기면 화내고(怒情),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면 뿌듯해하고(喜情), 다른 사람이 나를 보호해주면 즐거워하는(樂情) 것이 보통 감정, 즉 정(情)이라고 이제마는 말합니다. 또한, 속이고 업신여기고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사람 사이의 행위가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은 아무 이유 없이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정(情) 또한 사회적 감정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감정은 아닙니다. 이런 감정은 격렬하고 폭발적, 폭력적으로 표출됩니다. 그래서 정(情)은 촉급(促急)하다고 이제마는 표현합니다.

 

격렬하게 발생한 감정은 몸의 생리적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약하게 만듭니다. 태양인(太陽人), 소양인(少陽人)은 슬퍼하고 화내는 감정이 격렬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고, 태음인(太陰人), 소음인(少陰人)은 뿌듯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격렬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격렬해진 감정은 절제해야만 몸의 움직임도 정상을 회복합니다. 격렬한 정(情)은 악하지만 이를 다시 갈무리하고 절제하는 과정을 통하여 선(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정(情)이 드러나더라도 절제를 통하여 드러난다면 이는 선합니다. 이렇게 정(情)을 격렬하게 표현하느냐, 아니면 절제하여 표현하느냐에 따라 정(情)이 몸에 끼치는 영향이 달라집니다.

 

정(情)은 감정이지만 또한 사람의 욕구이기도 합니다. 감정이 생겼나는 것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구를 포함하는 정(情)이 선(善) 또는 악(惡)으로 드러남은 결국 그 사람의 욕구가 어느 쪽을 지향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마는 공익을 위한 욕구는 선하고 개인의 부귀영달을 위한 욕구는 악하다고 했습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욕구를 분출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마 의학의 목표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몸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입니다.

 

 

다음 호에는 사상의학에서 성정이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글_곽노규

강남 동일한의원 원장

세명대 겸임교수

 

 

참고문헌

1) G. 레이코프, M. 존슨. 몸의 철학. 임지룡, 등 역. 서울: 박이정; 2011. 45-51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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