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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ecial우리들의 傳說
    • 2025.04.29
    • 조회수 8
  • 2025.04.29 조회수 8

우리들의 傳說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전설이 있다.

雲溪 김정제

 

 

 

 

Do you know …?

 

당신은 《동의보감》을 아는가? 아마 《동의보감》과 허준에 대해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 적지 않게 등장했던 탓도 있지만, 이 책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계기는 따로 있다.

 

 

아마 1990년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著)이 《동의보감》을 대중에게 알린 첫 번째 매체일 것이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방영된 드라마 〈허준〉은 무려 네 번이나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는데, 특히 1999~2000년도에 방영된 작품은 무려 63.7%라는 놀라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소설과 드라마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미래를 한의학에 거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고작 소설, 드라마로 한의학과의 인기가 급작스럽게 치솟고 한의사의 위상이 올라갔다고 하면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 그랬다. 실제로 《소설 동의보감》을 읽고 감명 받아서, 혹은 드라마 〈허준〉 때문에 높아진 한의학 위상 때문에 한의대에 오게 되었다고 대답했던 ‘허준 키즈’들이 존재한다. 이제는 아저씨나 아줌마가 된 ‘허준 키즈’들이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환자들을 치료한 경험,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의학 서적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은 1610년에 완성되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후, 왕실에서는 여러 질환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해 《동의보감》을 한글로 간행하여 보급했다. 2009년 유네스코는 탁월한 의학적 내용과 세계 최초로 발간된 공중 보건안내서라는 점에 주목하여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동의보감》을 등재했다. ‘동양 의학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의보감》은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 유산 중 유일한 의학 서적이다.

 

‘한의학’이라고 하면 보통 대중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동의보감》이다. 그렇지만, 《동의보감》의 내용을 비판 없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유네스코에 《동의보감》이 등재된 2009년 당시 의협은 “《동의보감》은 ‘투명인간이 되는 법’, ‘귀신을 보는 법’ 등 오늘날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동의보감》의 일부 내용을 침소봉대한 논평을 내놓아 빈축을 산 적도 있다. 여타 원전들도 비슷하지만, 워낙 시대를 달리하는 책이라 현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도 종종 보인다. 이 때문에 위처럼 한의학 전체가 비과학적이라는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오해가 생긴 데에는 제법 악의적인 폄훼와 정치적인 조작도 한 몫 크게 차지한 것이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비단 외부에서의 시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의계 내부에서조차 과거의 원전에 집착하는 방식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강력하다. 과학과 인류의 지식이 끊임없이 발전했는데, 21세기에도 여전히 수백 년 전, 수천 년 전 지식을 익혀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되었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허준>이 상징하는 ‘현대의학과 차별화된 한의학’의 매력에 이끌려 한의사가 된 세대들이 현재는 《동의보감》이 대표하는 한의학의 원천적 지식들을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우리들의 전설〉 코너에서는 한 전설의 삶을 되돌아보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 대해 고민해보기로 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동의보감》에 정통하여 전문연구자로 이름 높았던 바로 고(故) 김정제 선생이다.

 

 

 

생애

 

운계(雲溪) 김정제 선생은 1910년 8월 16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선생의 모친은 몸이 몹시 편찮았다. 한의사, 양의사 모두에게 진료를 받았는데, 양의사는 어쩐지 신통치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친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직접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선생은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김정제 선생은 17세에 황해도 송림시에 동양의학원을 찾아가 당시 명의로 알려진 김태희(金泰希) 선생에게 한의학을 전수(傳受)하였다. 그것도 17세에!

 

김정제 선생은 의생시험에 합격한 이후 황해도 사리원시에 한의원을 개설하여 진료하다가, 은퇴한 김태희 선생에게 성제국한의원의 운영을 인계받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진료를 이어오다가 1956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성제국한의원(聖濟局漢醫院)을 개설하였다. 공자가 이르길, “40, 50이 되어도 명성이 없다면 역시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子曰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당시 선생의 나이는 52세였는데, 선생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고 한다.

 

1961년 5 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사정부는 각 분야에 개혁을 강행했다. 한의계에도 그 영향은 지대했는데,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3조 2항과 의료법 개정안 제 14조 2항은 동양의약대학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 한의학 교육뿐만 아니라 한의사 제도가 폐지될 위기에 처했다. 한의학 역사 중 최대의 암흑기였다. 한의계는 동양의약대학 부활 투쟁을 선언했다. 이때, 대한한의사협회장의 후임자로 김정제 선생이 추대되었다.

 

1963년 김정제 선생은 대한한의사협회장에 당선되었다. 선생은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문사분과 위원장인 홍종철을 집으로 초대했다. (홍종철은 김정제 선생의 환자여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선생은 한의계의 입장을 홍종철에게 전달했다. 곧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폐기되고 의료법 개정안도 수정되어 동양의약대학이 부활했다. 바람직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정책 결정 과정이지만, 당시 60년대를 생각해보면 한의계로서는 감사한 방법이었다. 현재 6년제 한의과 대학은 김정제 회장의 공로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65년 동양의약대학이 경희대학교로 합병되었다. 김정제 선생은 교수로 취임하여 후학 교육에 힘썼다. 이후 한의과 대학의 초대학장, 부속한방병원장까지 겸임했다.

 

 

《동의보감》 귀신

 

김정제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얘기가 뛰어난 암기력에 관한 것이다. 25권이나 되는 《동의보감》을 암송한 것은 물론 수백 종의 상용 처방을 약물의 분량까지 완전히 외우고, 약성가를 무불통지(無不通知), 14경맥 유주(流注)를 그림 보듯이 훤히 꿰어 임상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을 완벽히 갖추었다고 한다.

 

김병운 전 경희대 학장은 ‘한국 한의학의 정체성과 운계 김정제 선생님’이란 강연에서 김정제 선생을 회고했다.

 

“아마 《동의보감》을 편찬하신 허준 선생님도 운계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면 깜짝 놀라셨을 것.”

 

“비록 자신의 저서일지라도 누가 그 내용을 전부 암송할 수 있을까.”

 

“25권이나 되는 《동의보감》의 갈피마다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줄줄 외우는 예지, 저자인 허준보다 《동의보감》을 더 잘 이해하는 듯한 실력은 안암동 구교사에 빽빽이 들어앉은 학생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동의보감》을 암송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제대로 한 번 읽는 것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데, 하물며 암송했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시험 기간에 몇 개 되지 않는 조문 암기에도 쩔쩔매면서 머리 싸매고 한참을 되뇌어야 겨우 머릿속에 구겨 넣을 수 있었는데,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밀려온다.

 

단순히 암송하는 데 머무른 게 아니라 약물 처방에 있어서도 수증가감(隨症加減)의 묘를 발휘하며 다양하게 변방(變方)하여 운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치료가 한의학 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문헌에 따랐다고 하니 한의학에 정통했다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정제 선생의 《동의보감》 암송강의 파일과 정리본은 지금도 남아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기 바란다. 의외로 쉽게 구할 수 있다. 오래된 녹음 파일에서 할아버지가 옛날얘기를 해주는 듯한 《동의보감》 강의가 흘러나온다. 단순히 암송하는 게 아니다. 본인의 생각을 말하듯 막힘없이 술술 《동의보감》 원문을 읊으며 설명하는데, 책을 보며 읽어보라고 해도 그토록 자연스럽게, 망설임 없이 읽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강의의 일부밖에 들어보지 못했지만, 《동의보감》 원문과 설명이 어우러져 거침없이 이어지는 선생의 강의에 깊은 감명과 충격을 받았다. ‘허준보다 《동의보감》을 더 잘 아는 사람’이라는 칭송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한의학을 위하여

 

1973년 김정제 선생은 “한의학을 현대 문화사조에 적응할 수 있는 학문으로 개화 발전시키자.”는 뜻으로 사비를 털어 동양의학연구원이라는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동양의학연구원에서는 다음의 주요 목표를 두었다.

 

1. 원전 및 한의약 이론에 관한 연구 분석과 개발

2. 동양의학의 임상 진료에 관한 연구 개발

3. 한약의 규격화와 제제개선 및 약효에 관한 연구 개발

4. 동양의학의 학술 연찬에 관한 사업

5. 동양의학에 관한 학술지 발간 및 출판사업

6. 동양의학에 관한 국제학술 교류

7. 학술 포상 및 장학금 급여사업

8. 한방진료 봉사 및 한의약 계몽사업

 

동양의학연구원의 목표에 따라 선생은 학술활동을 이어갔다.

 

 

1974년 《진료요감(診療要鑑)》을 간행했다. 이는 김정제 선생의 대표작으로 《동의보감》에 대한 깊은 연구와 선생의 임상 경험방이 담겨있다. 이 책에 담긴 처방은 지금도 임상에서 애용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서양의학 위주로 전염병이 관리되었다. 한의학이 가진 이점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의 사회적 위상이 점차 축소되었다. 한의학의 이점을 알리면서 사회적 위치를 바로잡고자 한의사 단체인 동서의학연구회에서 ‘방역정기산(防疫正氣散)’이란 처방을 창방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처방은 내용에 약간 차이가 있지만, 《진료요감》에도 수록되어 있다. 선생은 ‘방역정기산’을 계승한 뜻을 ‘자서(自序)’에 밝혔다.

 

“과학의 첨단을 걷고 있는 것으로 자부하는 서양의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난치병과 불치병이 아직도 허다하며, 이러한 영역에서 오히려 한방요법이 주효하는 경이적인 치험례를 수다하게 목격할 때, 새삼스럽게 수 천 년에 걸친 동양의학의 고귀한 의료경험의 유산이 소중함을 절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오한 동양의학의 진수를 발견하고, 이를 옳게 연마하여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할 수 있게끔 정비·발전시켜, 인류의 보건향상에 기여하도록 사계(斯界)의 예지를 집중시켜야 할 것으로 믿는 바이다.”

 

선생의 한의학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1975년에는 《동양의학(東洋醫學)》이라는 한의학 학술잡지의 발행인으로 참가하였다. 김정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창간사를 남겼다.

 

“학술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계 석학(碩學) 대가(大家)들의 연구와 협심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망(要望)하는 계제(階梯)에 이러한 과제의 해결에 길잡이가 되고 또한 학술연구의 광장이 되고자 본지를 창간하여 고고(呱呱)의 성(聲)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전설은 잡지를 발행하는 것인가. 선생의 많은 업적 중에서 특히 눈에 확 들어온다.

 

 

1975년 11월 간행된 《동양의학》 창간호

 

이 외에도 선생은 대한 기독한의사회를 조직하여 장학금 지급, 무의촌 진료, 국내외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선생은 평생을 후진 양성과 진료 활동에 계속 힘쓰다가 1988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이렇듯 한의학 발전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면서도, 정성을 다해 환자를 진료했다. 한의학을 접하게 된 데에 백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김정제 선생의 조카, 김길훤 교수가 인터뷰한 기사를 통해서도 선생의 면모를 알 수 있다.

 

환자를 신처럼 생각하고 신앙으로 대하는 정신도 그분에게서 배웠습니다. 조카가 되고 제자가 되지만 저에게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고 화를 내신 적도 없습니다. 경락을 잘 짚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실습 삼아 내놓으셨지요. “한 번 놔보시게.”라며 침구(鍼灸)를 들게 하고 잘못이 발견되면 조금도 얼굴을 찌푸리는 법이 없이 “여기를 다시 한 번 놔보시게.”하며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가르침은 언제나 정중하고 경건하게 느껴졌습니다.


환자를 대하는 모습은 참으로 정성스럽고 겸손했습니다. 환자와 마주 앉으면 수시로 안경을 벗어 이야기를 나누시곤 해서 어느 날 “큰아버님, 왜 안경을 자꾸 벗고 말씀하세요?”라고 여쭸더니 “어른들 앞에서는 안경을 벗고 말하는 법이라네.”라고 조용히 대답을 하시더군요.

 

환자를 대하는 의사로서 선생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환자를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다.

 

 

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인가?

 

무더운 여름, On Board에서는 김정제 선생의 뜨거운 삶을 되돌아보며 ‘온고이지신’이라는 묵은 주제를 다시 화두로 잡았다. 이 표현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것으로 <위정편(爲政篇)>에서는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라고 적고 있다. 역사를 배우고 옛 것을 배움에 있어, 옛 것이나 새 것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따뜻할 온(溫)’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옛 것을 다시 데운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세대갈등은 한국사회의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으며, 이는 한의학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디까지가 경계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어쨌든 선배들이 보기에 후배들은 한의학의 기본 정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허황된 것만 좇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소위 후배들이 보기에는 선배들이 아직도 구닥다리 옛 것에 집착하며 새로운 지견을 좇지 못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같은 직업군에 묶인 한의사들조차도 그 세대나 교육 내용에 따라 대화가 제대로 통하지 못 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무언가 핀트가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 다들 받아보지 않았나? 그리고 이는 다시 소통의 부재로 이어져 세대 간 갈등을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세대갈등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나 가장 큰 원인은 세상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과학 기술의 발전속도와 인류 지식의 확장 속도는 가히 폭발적이다. 불과 수년 전의 지식이 의미 없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보니 근자에 올수록 불과 몇 학번 차이에 불과한 세대들의 사고방식이나 교육 내용, 관심 분야가 상이해지는 일 또한 빈번하다.

 

 

특히 2016년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이루어졌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Google Deepmind Challenge match)는 인류 전체에 충격을 전해주었다. 결과가 나오기 이전까지 인간이 기계에게 바둑에서 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알파고의 승리 이후 비로소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 속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실감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로 인해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하게 여기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기존의 지식이나 관념이 절대적으로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어느 하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없다. 소위 보수적인 분야라고 일컬어지는 의학 분야에서조차 상황은 비슷하다. 여태까지의 의학 데이터들은 정말로 모두 옳았던 것일까? 내가 믿고 배워왔던 지식들이 정말 절대적인 것일까?

 


현재의 지식인들은 도저히 전체의 모습을 바라보기 불가능한 정보의 넓고 넓은 바다 속에서 부표 하나 없이 헤매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신약 개발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다. 사실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물질을 이용해서 약을 만드는 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방법보다 훨씬 보편적이다. 1981년부터 2006년 사이에 개발된 974개의 약물 중 63%가 자연에 있는 물질 또는 이를 변형한 화합물이었다고 한다. 일반신약은 새로운 특정성분을 추출하거나 가공하여 약물을 만드는 반면, 천연물신약은 경험적인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생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적다. 또한 천연물신약은 신약개발에 필요한 기본적인 임상 및 독성 기록에 대한 정보를 한약, 생약과 관련한 서적 등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신약 후보를 선정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임상 이전단계까지의 개발비용과 기간을 절감할 수 있다. 최근 신약개발 비용의 증가와 높아진 안전성에 대한 요구, 그리고 블록버스터 신약들의 특허 만료에 따라 위기에 빠진 제약계에서 한약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연물질은 안전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지적(知的)으로 솔직한 답은 ‘아니요’ 또는 ‘모른다’일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여전히 티끌만큼도 되지 않으니까… 다만 한약의 경우 효능과 안전성 자체가 수천 년에 걸쳐 경험적으로 입증되어 있기 때문에 신약 개발 단계에서 한약제제의 경우 임상 1상 시험을 면제해준다.

 

인류의 삶은 시행착오의 연속선상에서 전개되어 왔다. 왜 우리는 옛 것을 익히는가? 왜 우리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하는가? 학문과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옛 것을 제대로 알고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기본적인 태도는 그야말로 안정성의 기초이다. 지금까지의 발전 역시 지난 선배들의 노력과 과거의 성과들이 쌓여오며 이루어진 것이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미래가 아무리 혼란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지금까지의 기반을 토대로 나아가야 한다.

 

한의학이기 때문에 치료의 근거를 꼭 원전에서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전형적인 아집의 태도이다. 단 한의학은 긴 역사를 통해 치료의학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해왔으며, 기술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치료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마음과 몸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옛 것에 집착하자는 뜻이 아니다. ‘온고이지신’이라는 명제는 옛 것에 대한 단순한 전승이 아니라 새 것의 창조라는 맥락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故’가 ‘故’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新’으로 참여할 때이다. ‘新’을 떠난 ‘故’ 는 존재하지 않는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려 했던 전설의 삶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스스로의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들의 전설, 김정제 선생이 이렇게 열성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천은 한의학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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